읽고 단상쓰기#17일차
삶을 바꾼 만남(정민 지음, 문학동네, 2011)
#17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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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쓰기
스승과 제자가 드디어 만났다. 다산 해배 후 다산초당의 거의 모든 제자들이 스승의 본가를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는데 황상은 긴 세월 동안 모습은커녕 소식 한자 없었다. 야속함을 넘어 걱정이 될 정도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황상은 왜 그랬을까. 다산초당이 세워지고 새로운 제자들이 형성되면서 신분의 차이와 생계의 압박으로 발길을 끊고 연락조차 못했다고 핑계를 대기엔 너무도 오랜 시간의 공백이라 이유가 충분치 않다.
아마도 황상은 그 즈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나름의 예견과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한 결심을 동시에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끝이 좋아야 좋다’는 말이 있듯 만남의 끝도 그러하다.
황상은 스승과의 그 귀한 만남을 최대한 그대로 간직하고자 행여나 스승에겐 짐이 될까봐 또한 혹시나 스승에게 서운한 마음이 생길까 스스로를 경계하고 염려한 나머지 스승과 거리를 두는 방법으로 나름의 애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황상이 이제야 비로소 스승을 찾아왔다. 수없이 들락거리던 그 수많은 제자들이 모두 자취를 감춘 뒤 이제 남은 제자 하나 없이 홀로 병상에 누운 늙은 스승을 찾아왔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흘러간 이유들이야 어쨌든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기억하는 아름다운 지난날의 회상 글에서 나 또한 함께 울었다.
인상 깊은 부분
배 위에서 황상은 스승이 주신 보퉁이를 끌어안고 울었다. 삼근계를 받던 1802년 10월 17일의 풍경이 떠올라서 울고, 학질에 걸려 덜덜 떨며 공부할 때 [학질 끊는 노래]를 지어주며 힘을 실어주던 그 정다운 목소리가 생각나서 울었다. 신혼의 단꿈에 빠졌을 때 혼이 다 나갈 만큼 야단치시던 그 편지가 생각나서 울고 아버지의 장례 때 다시는 안 보겠다며 서슬 파랗게 진노하던 그 사랑이 그리워서 울었다. 살아서는 네 편지를 다시는 받아보지 못하겠구나 하는 스승의 편지를 진작 받고도 7년 넘게 미적거린 자신의 미욱함이 미워서 울고, 그 아픈 중에 제자를 위해 삐뚤빼뚤하게 규장전운 이란 글자를 쓰던 그 마음이 고마워서 또 울었다.(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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