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단상 쓰기

<이스탄불>#4일차-10장

카민셀 2024. 12. 1. 16:37

이스탄불 - 오르한 파묵 #4일차

이난아 옮김 (민음사)

 

#4일차
10장. 비애 - 멜랑콜리 - 슬픔


 

이스탄불의 해질녘

 

 

 

 

단상쓰기

어둠이 깔린 저녁에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들에 대한 비애의 풍경에 대한  끝나지 않고 징징대고 늘어지는 문장 때문에  비애고 뭐고 문장의 길이의 압박에 주어 동사가 행방불명되어 몸서리치게 지칠 때쯤 (p.134에서 시작한 이 문장은 무려 p.141에서 끝났다.) 비애는 대단한 상실감에서 온다는 것과 때문에 지나친 자부심은 놀랍게도 부정적 감정에 속해있음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이토록 정성 들여 이스탄불의 비애를 전달하려 애쓰는 오르한에게 한 가지 고백을 하고 싶다. 당신이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나는 ‘한’이라는 좀 더 다이나믹한 감정이 5천 년어치 쌓인 땅에 태어난 한국인이라 당신의 이스탄불이 가진 ‘비애’에게 그만 좀 슬퍼하고 차라리 ‘화’를 내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이다.

 

오르한이 멜링의 그림처럼 중심부나 끝이 없이 세세하게 글로 설명하고 있는 이스탄불의 ‘비애’는 위축된 슬픔에 가깝지만 한반도의 ‘한’은 슬픔을 삼킨 분노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결국 터키와 한반도는 폐허 후 찾아온 상실과 슬픔에 대처하는 감정의 형태가 각각 달랐고 이 차이가 꽤 다른 지금의 차이를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한반도의 안쓰러운 ‘한’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또 이런 생각을 한다. 집요하고 깊은 슬픔이 찾아오면 슬픔이 슬픔에게 너무 오래 말을 걸지 못하도록 한 번씩 슬픔에게 화라도 내야 한다고.

 

 

 

 

인상 깊은 부분

이스탄불 사람들도 가난과 의기소침으로 인해 자신들의 세계로 물러나 움츠리고 있다. 삶에 맞서 의식적으로 신비주의 문학에서 비애가 획득한 고메한 존경을 이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실패, 우유부단, 패배, 빈곤을 의식적이며 자랑스럽게 선택한 이유러럼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애는 단지 삶에 있어서의 커다란 상실과 결핍의 결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진짜 이유처럼 제시된다. (중략)태어날 때부터 품었던듯한 이 비애 때문에 연인, 돈, 성공 앞에서 의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이 비애는 이스탄불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이 마비의 변명이 된다.(p.146)

이스탄불은 하나의 대도시로서 비애를 모두 함께 긍정하며 산다. 이스탄불과 관련된 현대 터키 문학, 시, 음악은 이 감정을 중시하며 자랑스럽게 취하고, 이것을 어떤 승리감으로 만들면서, 하나의 공동체로서 도시를 설명하고 통합시키는 중심부로 만들었다. 이스탄불에 관한 소설들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인 [평온]에서 주인공들은 자신들에게 도시의 역사, 페허, 상실감이 부여한 비애 때문에 의지가 박약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p.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