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 오르한 파묵 #6일차
이난아 옮김 (민음사)
#6일차
|
단상쓰기
오르한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충고와 비판의 대상으로 보고 할 수 있다면 강압적으로라도 가르쳐야 하는 사람들로 보는 것 같다. 일반 시민을 ‘군중’이라고 표현한다거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매너와 예의를 가르쳐 주어야 했다는 표현에서 독단적 명제의 강압이 느껴졌다. 게다가 그 당시 글 쓰는 사람들은 당국을 비판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군중들에 대한 충고글을 쓰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며 그들 ‘덕분에’ 그 당시의 이스탄불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는 주장은 일방적 옹호와 무리한 폄하로 얼룩진 괴변에 가깝게 들렸다. 충고가 담긴 칼럼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담긴 행복함이 떠올랐다니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당황스럽다. 오르한 파묵은 단지 엘리트주의적 성향인가? 오르한은 동서양 문화의 조화로운 공존보다는 서구화된 이스탄불을 원하는 건가?
인상 깊은 부분
아흐메트 라심에서 부르한 페렉까지 많은 칼럼 작가들은 20세기 내내 도시 편지들 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않고 글을 썼는데, 도시인과 도시에 대한 이런 글들은 이스탄불의 색채, 냄새, 소리에 작가의 유머와 개성을 반영했을 뿐 아니라, 다른 역할도 했다. 바로 이스탄불 사람들에게 거리, 공원, 정원, 상점과 유희 장소, 배, 다리 광장, 전차에서의 매너와 예의를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술탄, 국가, 정부, 경찰, 군인 종교 지도자뿐 아니라 시 당국조차 비판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엘리트 독자나 작가는 마음속에 있는 비판 혹은 분노의 불길을 분출하기 위해 무력한 사람들, 익명의 군중들, 도시의 거리에서 걷고, 돌아다니고, 일을 하는 이스탄불 사람들을 유일한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신문 독자들과 칼럼 작가들 정도의 교육을 받지 못한 이스탄불 사람들이 지난 130년 동안 거리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떤 소음을 냈는지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군중들에게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연민으로 그리고 대개는 무시하는 투로 질책했던 도시 편지를 쓰는 사람들의 집요함 덕분이다.
읽고 쓰는 것을 배운 후 사십오 년간, 서구화 추진 혹은 전통적 가치를 고수하고자 하는 취지로 시작된 이러한 질채이나 충고들이 담긴 칼럼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손으로 가리키지 마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행복하게 떠오른다. (p.192)
'읽고 단상 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스탄불>#5일차-11, 12, 13장 (3) | 2024.12.02 |
---|---|
<이스탄불>#4일차-10장 (1) | 2024.12.01 |
<이스탄불>#3일차-7, 8, 9장 (1) | 2024.11.27 |
<이스탄불>#2일차-4, 5, 6장 (2) | 2024.11.26 |
<이스탄불>#1일차-1, 2, 3장 (1) | 2024.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