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단상쓰기#19일차
민병갈, 나무 심은 사람(임준수, 김영사, 2021)
#19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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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쓰기
민 원장은 사람보다 나무를 더 사랑했다고 한다. 죽어서도 나무의 거름이 되고 싶어 하신 민 원장이다. 나무를 사랑했고 나무로 푸른 꿈을 완성시키셨다. 그리고 거기에 나무와 함께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푸른 꿈을 꾸셨던 거 같다. 사람은 나무와 다르게 훨씬 더 복잡한 대상인데 이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말년에 상심이 크셨던 게 아닐까.
대가족은 아버지의 역할로 지탱하는 것은 맞지만 이를 지속시키고 나아가게 하는 것은 사실 어머니의 역할이 더 크다고 본다. 유년 시절 은연중에 친가에선 내 몫의 의무를 배웠고 외가에선 정다움의 힘으로 나아 갈 힘을 배웠다. 이는 각각 아버지 어머니로 축약되어 나에게 매 순간 전달되었다. 아마도 민 원장의 양아들 송진수가 팔순 잔치에 끝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오랜 시간 의무에 대해서만 강요당한 부작용이 아니었을까 하는 짧은 생각을 해본다.
민 원장의 속을 상하게 했던 이런 안타까운 말년의 이야기마저도 보통의 한국인과 너무도 닮아 있다고 생각되었다. 가장 기대하고 아끼던 자식이 장성 후엔 결국 부모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거나 외환 위기 때 거의 모든 한국의 아버지들이 충격을 받은 이야기까지도 민 원장은 시간은 한국인의 시간 그 자체였다.
그러나 민 원장의 나무에 대한 사랑만큼은 한국인이 따라갈 수 없는 열정과 업적을 남기셨다. 그동안 수목원에 부담이 될까 순수한 기부마저 거부해 왔다는 것에서 나무에 대한 애정의 깊이가 남달랐음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인상 깊은 부분
민 원장은 생전에 매장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죽어서도 나무의 거름이 될 거야” 라며 한 줌의 재로 나무의 자양분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양아들 송진수가 강력하게 주장해 전통적인 매장을 했다. 그러다가 2012년 4월 8일 10주기를 맞아 당시 수목원장직을 맡은 조연환 전 산림청장이 주도해 고인의 유지를 지켰다.(p.554)
이 날 그가 그토록 기다린 사람은 양아들이 낳은 두 손주였다. 생일이나 명절에는 으레 한복을 곱게 입고 와서 큰절을 하던 남매가 해 질 녘까지 안 보이자 눈물을 흘리며 잔치 도중 숙소로 돌아갔다. 당시 송진수 가족은 수목원 집을 나와서 따로 살고 있었다.(p.556)
태산이 무너져도 끄떡없을 듯했던 민 원장이 충격으로 휘청이는 모습을 본 것은 1997~1998년 외환 위기 때였다.(p.559)
남의 신세를 지면 그만큼 수목원에 부담이 된다고 믿은 민 원장도 위기의 홍역을 치른 뒤에는 순수한 기부는 환영하는 자세로 바뀌었다. 이때의 충격이 너무 컸던지 그는 1년 뒤인 2001년 초 치명적인 직장 암 진단을 받았다.(p.561)
가까이에서 본 민병갈은 한마디로 사람보다 나무를 더 사랑한 자연인이었다.(p.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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