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쓰기 73

나의 인생 #20 질서, 위생, 규율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나의 인생: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 20일차이기숙 역 (문학동네, 2014)  #20일차질서, 위생, 규율236p~247p   단상 쓰기드디어 유대인들이 (당연히 가망 없기는 하지만) 독일군을 향해 '저항'이란 걸 하기로 결정한다. 그 지경이 되어서야 벼랑 끝에서 등 떠밀리듯 결정당한(?) 측면이 다소 있기는 하지만 아무런 저항 없이 자신이 목숨을 방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나로서는 나치의 비인간적임 이전의 비인간적인 현상이라고 생각되어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물론 저항의 결과가 100%에 이르는 죽음일지라도 그들이 하기로 한 ‘저항’이라는 결정에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느낌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더니 진짜였다. 독일어 책을 열심히 읽어서 독..

나의 인생 #19 눈부시게 말쑥한 채찍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나의 인생: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 19일차이기숙 역 (문학동네, 2014)  #19일차눈부시게 말쑥한 채찍227p~235p   단상 쓰기유대인들이 환적장에 끌려 나와 가스실로 향하는 열차에 줄을 서서 타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들이마셨던 숨을 내뱉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급기야 부모님을 회상하는 마지막 장면에선 겨우 내뱉던 숨마저 한동안 아예 멎어버렸다. 죽으라면 고분고분 죽으러 가는 무기력한 유대인의 행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가스실로 가는 것을 알고 있는 음악가가 마지막 소지품으로 악기를 들고 온 이유가 자신이 사랑했던 음악이나 악기에 대한 마지막 의미 추구가 아니라 아니라 독일군에게 끝까지 자기 한 목숨을 기대어 보려는 마음이었다는 게 이해가 가면서..

나의 인생 #18 지식인 순교자 영웅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나의 인생: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 18일차이기숙 역 (문학동네, 2014)  #18일차지식인 순교자 영웅219p~226p  단상 쓰기 체르니아코프..그가 목숨을 다해 지키려 한 동포들에 대한 외로운 책임감에 마음이 아파왔다. 이런 그에게 비난과 책망을 주던 이들이 다름 아닌 그의 동포들이라는 사실은 고통 보다 깊은  슬픔으로 느껴졌다. 그 역시 다른 운 좋은 유대인처럼 폴란드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책임을 다해야 할 그 괴로운 자리를 끝까지 지키기로 선택했다.만약 체르니아코프가 비극적인 유서와 함께 죽음으로 사임을 선택하며 극적으로 사라지지 않았다면 동포들의 비난과 책망의 방향은 과연 어떻게 변질되었을지 생각하니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비극으로 느껴졌다. ..

나의 인생 #17 빈 왈츠에 실린 사형 선고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나의 인생: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 17일차이기숙 역 (문학동네, 2014)  #17일차빈 왈츠에 실린 사형 선고209p~218p   단상 쓰기앞으로 일어날 홀로코스트의 처참한 학살을 이미 알고 있는 입장이어서 그런지 읽는 내내 답답한 것은 독일군의 탄압이 점점 노골적으로 눈앞에 뻔하게 조여오는 가운데 게토의 유대인들은 왜 이렇다 할 조직적인 저항이 없는가에 대한 것이다.  한편으론 마르셀은 독일 장교를 간단한 문서작성이나 독일어조차 더듬거리며 읽는 형편없는 야만인으로 묘사했지만 한편으론 점령 초기부터 신속하게 유대인을 게토로 몰아넣었고 이후로 차근차근 유대인을 단결시킬 지식인부터 급습하여 사살하며 급기야 유대회 위원들까지 인질로 잡아가는 등의 신속 정확했던 진행 상황을 ..

나의 인생 #16 음악이 사랑의 양식이라면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나의 인생: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 16일차이기숙 역 (문학동네, 2014)  #16일차음악이 사랑의 양식이라면196p~208p   단상 쓰기게토에서의 유대인을 향한 억압과 폭력은 자유와 평화를 더욱 갈망하게 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망 앞에서도 잠시나마 안도감과 위로를 주는 것이 예술의 힘 인가보다. 마르셀이 말했듯이 예술의 3형제 음악, 미술, 문학 중에 가장 즉각적인 감정 전달의 힘을 가진 것은 당연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이 밝혀낸 영향력 면에서도 소리의 파동은 거의 빛과 동급이 아니었던가. 이번 장은 읽는 내내 쇼생크 탈출의 명장면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주인공인 듀플레인이 교도소 방송실에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틀어 교도소 전체에 들리게 하는 장면..

나의 인생 #15 어느 미치광이의 푸념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나의 인생: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 15일차이기숙 역 (문학동네, 2014)  #15일차어느 미치광이의 푸념188p~195p  단상 쓰기점점 게토의 상황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힘들어 말자고 나름 다짐을 했다. 언젠가 홀로코스트 영화 속에서 보았던 충격적이고 참담한 장면들과 안네의 일기를 읽으며 떠올렸던 안타까운 마음을 일부 겪었으니 책갈피라도 꽉 붙들고 조용히 읽어가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살인 사건은 없지만 식인사건은 있는 도시라니… 이건 처음 듣는 지옥이었다.  그것도 배고픔에 미쳐버린 아들의 시신을 먹으려 한  어머니의 식인 사건을 읽고 있자니 찰나의 분노를 넘어 슬픔에 잠식당한 채 온 기운이 빠져나간다. 이런 일들은 왜 일어났어야 하는 걸까...

나의 인생 #14 전염병 통제 구역 그리고 게토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나의 인생: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 14일차이기숙 역 (문학동네, 2014)  #14일차전염병 통제 구역 그리고 게토180p~187p  단상 쓰기‘문학 평론가’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인간 마르셀은 어떤 사람인 걸까. “남들이 나를 좋게 볼지 나쁘게 볼지 개의치 않고 말한다면, 아무 경험도 없는 내가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라는 게 정확히 무얼 말하는 걸까. ‘주변인들과의 문제’임에도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고 하는 걸 보니 ‘남’에 대한 의식을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한 것은 분명한데 아직 스무 살 즈음의 어린 청년임을 감안하더라도 앞으로의 사회생활에서도 여러 번 되풀이됐다고 하니 경험 부족 때문만은 아니라는 추측이다. 게다가 굳이 덧붙여봐야 근거가 될 수 없는 ..

나의 인생 #13 고인과 그의 딸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나의 인생: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 13일차이기숙 역 (문학동네, 2014)  #13일차고인과 그의 딸170p~179p  단상 쓰기헤어진 지 수년이 흘렀어도 마르셀 앞에서 처량한 눈물이 나오는 걸 보니 타티아나에게 마르셀은 사랑이었나 보다. 옛 연인의 냉정한 눈빛 앞에 구슬픈 눈물을 흘리다가도 마르셀의 잘못된 선택을 두고 볼 수 없어 그가 나아갈 길을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그렇게 떠나보내는 마르셀은 그녀에게 영원한 슬픔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사랑의 기쁨은 덧없이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은 영원히 남네.(p.175)마르셀은 이 시구가 반대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람에 따라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마르셀은 타티아나와 다시 만났을 때도 토지아만 생각했으니 타니아..

나의 인생 #12 사냥의 향연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나의 인생: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 12일차이기숙 역 (문학동네, 2014)  #12일차사냥의 향연160p~169p  단상 쓰기나치군이 유대인에게 그토록 주고자 했던 ‘모욕’이라는 사전적 단어가 궁금하여 찾아보니 ‘깔보고 욕되게 함’이라는 뜻이었다. 마르셀은 나치군의 야만적이고 잔혹한 사냥을 직접 겪으면서도 그들이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은 줄 수 없었다는 부분에서 참담한 가운데 이상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나의 죽음보다 중요한 ‘나의 무엇’은 아마도 나 자신 외에는 누구도 망가트릴 수 없다는 가치의 발견이랄까. 그러니 사람 아닌 짐승이 나를 깔보든지 말든지 나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확실히 현명해 보였다. 한편으로 한국인으로서 자연스레 일본 침략 당시와 비..

나의 인생 #11 시와 전쟁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나의 인생: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 11일차이기숙 역 (문학동네, 2014)  #11일차시와 전쟁147p~159p   단상 쓰기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영화 ‘어톤먼트’의 대사가 떠올랐다. 속죄와 용서를 둘러싼 이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도 2차 세계대전 속에 휘말리는데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라는 결말 부분의 대사는 영화를 본 지 15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머리와 가슴에 각인되어 있다.마르셀이 말한 인생무상을 마딱드려야 사랑 같은 주제를 민감하게 받아들인다는 말은 언제고 내려놓아야 하는 삶이 되면 오히려 좀 더 삶의 본질에 집중하게 된다는 뜻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불안한 전쟁 속 피난처에서도 무언가 읽을거리를 찾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오솔길을 걸으며 시를..